생각 해보기


17
Dec 07

이명박 신드롬에서 파시즘으로..

먼저, 저 제목이 이명박이 파시스트라는 의도는 아님을 밝힌다. 이명박이 하는 말이 파시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알아서 이명박 파시즘의 하부구조속으로 자리잡아 버렸다는 점이다.

이명박의 공약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또 거기에 따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너무나 적다. 그의 운하, 교육, 세금 정책들은 내가 보기엔 정말 두려운 것들이다. 이명박 지지율의 근간은 그의 정책보다 그의 메세지 이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 기억하나요! 청계천을 보십시오! 서울버스를 보십시오! 추진력하나로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박정희식의 ‘추진력’, ‘밀어붙이기’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치의 파시즘에 열광했던 독일 국민들에 대해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들이 나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기 때문에 나치에 열광하고 복종하기를 원했다고 봤다. 또한 빌헬름 라이히는 인간의 성격 속에 파시스트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즉, 대중은 강력한 지도자 내지 독재자를 존중하기를 희구하고 있으며, 자신의 해방보다는 억압과 피압박을 욕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재자들보다, 대중들이 더 그런 지도자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대한민국은 굉장한 파시즘 국가이다. 이는 ‘황우석 사태’ 나 ‘월드컵 열기’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국민들은 ‘경제살리기’라는 추상적이면서 미화된 메세지와 그의 추진력이라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그를 지지하고있다. 이명박지지 현상은 그 안에 민족주의 성격이 없고, 히틀러의 유태인 이나 박정희의 공산주의 같은 타파해야 할 ‘적’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점이 달라 파괴력이 약해졌을 뿐 기존 파시즘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국민들은 그 하나의 메세지에 경도되어 그의 부패에 신경쓰지 않는다. 또 그가 말하는 ‘경제살리기’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이는지, GDP가 올라가도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그대로 인 것은 아닌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이명박이 광운대 동영상에서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라고 하더라도 그 것이 지지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짜피 이명박 지지자들은 이미 “이명박이 도덕성면에서는 조금 흠이 있지만….” 이라고 이명박 지지 이유를 말하기 시작한다. 이명박이 부패했건 안했건 나라경제만 살리면 그만 이라는 것이다.

대책없는 글이 되어버렸다. 슬프다.


17
Dec 07

토론의 목적

언쟁, 좋게 말하면 토론, 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토론의 목적은 무엇일까. 상대방을 설득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성공적으로 토론하고 있는것일까?

대학교에서의 진보적 정치 토론, 철학 토론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현실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많은 토론이 대학교 안에서 이루어지고있다. 내가 대학교에서 거쳐왔던 토론들은 결론이 어떠 했던간에, 나에게 커다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토론술은 진리를 찾는데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위의 말 처럼, 토론의 결과가 한 쪽이 이기고 한 쪽이 다른쪽의 의견에 무릎을 꿇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토론이 시작되면, 토론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지적인 허영심 때문이다.

결국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라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토론의 목적은 대부분의 경우 실패하고 만다. 서로의 입장차이를 확인하게 될 뿐이며,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방어하다가 튀어나온 의도적이지 않은 말 실수로 서로의 골만 깊어지기 마련이다.

토론은 아무나랑 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지 못한사람, 자신이 토론에 이기기 위해서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자신이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사람. 말싸움의 잡기술에만 능한 사람… 들과는 토론하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이다.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도 힘든 일이다.

일단 토론이 감정적인 싸움으로 치닫지 않고 이성적으로 진행 된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또한 토론 상황에서는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토론이 지나고 같은 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오면, 그 사람의 말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토론 당시에는 ‘지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방어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했던 상대방의 말이 나중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4
Dec 07

대학생의 리포트를 공개해 주세요

리포트 월드, 해피캠퍼스.

당신이 대학생이라면 한번쯤은 접해봤을 사이트이다. 대학생들의 리포트를 모아놓은 사이트. 나는 이런 사이트 들이 돈에 묶여서 500원짜리 지식을 팔고 있다는 현실이 아쉽다. 많은 대학생들의 리포트들은 질이 높은 리포트 들이다. 그 리포트들을 마음대로 접하고 읽을 수 있다면, 두꺼운 철학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이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학문을 하며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책을 전체를 읽어야 하는것이 바람직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짚은 지식이 아니고 넓은 교양을 위해서는 리포트 사이트의 리포트가 좋은 자료가 아닐까? 간단히 어떤 것에 대해서 알고 싶어 검색을 하면 리포트사이트로 연결되어서 아쉬울 때가 많다.

전국 대학생들의 리포트 저장소가 필요하다.


28
Oct 07

좋은 대학을 가야하는 이유

좋은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은 그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일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대학에는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많고, 그 속에서 자신도 더 열심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 만은 아니다. 그냥 계속 열심히 노력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것도 버릇처럼 몸에 배기게 되면 그저 자신의 버릇이 되는 것이다. 게으른 것이 버릇이듯이.

좋은 대학에는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많고, 그 속에서 자신도 더욱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게 된다.


15
Oct 07

웹서핑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오늘도 하루의 많은 시간을 웹서핑을 하면서 보낸다. 수많은 글 쪼가리들,
– 쌍용 비자금’으로 번진 신정아 게이트
– ‘홍드로’ 홍수아 시구에 잠실구장 또 한번 들썩
– 우분투와 데비안의 기형적 관계
– 대학생 12% “남북통일 필요없다”
– 이랜드보다 더 나쁜 놈은?

모니터 속에서 자극적인 문구로 나를 유혹하는 데에 성공한 글들을 소비한다. 저 글들이 나에게 진정한 정보가 되어 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냥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원인모를 불안감속에서 순간순간 구해주고 있을 뿐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들을 소화해내야 한다는 21C형 최첨단 불안감.

만약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10배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서 하루가 240시간이라고 하자, 그래서 지금보다 10배, 아니 20배의 웹서핑을 통해서 잡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나는 진리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설 수 있을까? 아, “웹서핑으로 진리에 다가가는 법”이라는 키워드로 웹서핑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네이버나 구글은 알지도 모르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한 표현인가? 그저 나의 시간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웹서핑이 나를 더욱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웹서핑은 나를 자라나게 하지 않는다. 수많은 정보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상처 입은 나에게 선사하는 최소한의 자위행위일 뿐이다.

나를 끊임없는 웹서핑 시간낭비의 늪에서 구하고, 조금 더 탈 구조적(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컴퓨터의 랜선을 뽑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니터 안쪽 사이버 세상 보다는 현실 세계가 조금은 덜 왜곡되어있다.


1
Oct 07

잘 사는 비법에 대하여

“경제대통령 이명박” 사람들은 더 잘 살기위해 경제대통령을 원하고 경제대통령 이미지는 이명박의 가장 큰 무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잘산다’라고 정의하고 있는걸까? GDP가 올라가면 TV에서 말하는 국민소득 2만불을 넘어 3만불시대가 오면 우리는 더 잘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숫자들에 회의적이다. 우리의 GDP는 거의 2만불이 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못하고있고, 인간관계는 더 건조해져 가고있다. 이웃들의 이름도 모르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는 너무 바빠졌다.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과거에 비해 너무도 편해졌지만,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수단이 진보 할 수록 후퇴하는 느낌이다.

나는 기술의 발전이 싫다. 딱 지금 수준으로 동결시켜 버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컴퓨터도 이정도 빠르면 됐고, 핸폰기능도 이정도면 충분하다. 전 인류가 10년동안만 기술발전을 멈추고, 기술 발전이 진행된 과거와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천천히 생각했으면 좋겠다. 또 지금 기술수준에 적합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도 필요하겠다. 이번 UCC선거 금지에 대한 법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과 사회시스템은 기술 발전의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있다.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그 시간에 휴식을 하고 적게 소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끊임없이, 수많은 미디어들에 의해 소비를 강요당하고, 무엇인가를 계속 사고, 소비하는 이 쳇바퀴는 계속 빨라지고 커지기만 할 뿐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비를 해야하는 의무’를 강요받으며 우리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그런 권리가 존재하는지도 아무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취업시즌에 대한민국 대학생 4학년 2학기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지, 우리 사회, 우리 직장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다운 쉬프트, 네스팅, 샐러던트“를 주장하지만 그냥 무조건 ‘일하기 싫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숫자로 대변되는 숫자를 올리는데 집착하기에는,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기에도 너무 바쁘다.


15
Sep 07

대학문예패 그 아름다움이여

나는 청춘 예찬론자다. 어느 민중노래의 가사처럼 “청춘은 한 생을 대신 하기도” 한다. 나의 대학생활에서 산틀이라는 풍물패 생활을 하면서 문예패 활동을 한 것은 참 소중한 경험이다. 선배들의 문예패로서의 고민에 비하면 나의 문예패로서의 고민은 그저 부족하기만 하지만 말이다. 청춘의 꽃인 대학생활에서 문예(문학+예술)패 로서의 고민은 꽃이 성장하기 위한 믿거름이다. 풍물패로서 대동과 나눔, 그리고 우리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아름다운 일이다.

아쉬운 점은, 그 풍물패, 문예패로서의 고민을 더 발전 시키는 문화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풍물과 문예를 사랑하고, 그 것을 퍼뜨리기 위한 시도는 우리에게 너무 부족하다. 우리패 속에서 잘하고, 우리끼리 좋으면 끝나는 분위기는 매우 아쉽다. 이는 어느정도 토론문화의 부재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풍물패의 공연을 교내 캠퍼스 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문예패의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문예패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들이 계속 고민하면 홍익대학교 앞의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거미전에 대학 문예패로서의 역할을 고민할 것이다. 이제 시작한 학교 밖 공연이 그들의 문예패로서의 고민의 시발점이 되길, 토론문화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


15
Sep 07

대한민국의 고질적 슬픔

완전하게 합리적인 사회는 가능한 것일까? ‘이퀄리브리엄’에서처럼 사람의 감정을 통제한다면 가능한 일일까? 감정을 인정하되, 합리적인 사회를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사회를 나는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대한민국에서 만연한 고질적인 비합리성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여성의 문제’ 와 ‘군대문화로 대변되는 획일주의’ 이다. 여기서 ‘여성의 문제’는 어찌보면 전세계적인 고민으로 후진국에서나 선진국에서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나는 우리나라 문화속에 깊숙이 녹아있는 ‘비합리적인 군대문화’에 반대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관계라는 것 자체가 커뮤니케이션과 뜻은 다르지만 같은 단어라고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군대문화에서 비롯된 ’1-way 커뮤니케이션’ 남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는 우리나라의 합리성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평등’은 상명하복의 1-way 커뮤니케이션의 문화속에서 망가져 버린다. 평등이 없이 진정한 자유가 존재할 수 없다.

군대를 가는 것은 남성이지만, 여성은 사회의 주도세력인 남성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1-way 커뮤니케이션은 대한민국의 남성과 여성모두에게서 합리적인 토론의 문화를 빼앗아가 버렸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슬픔’이다.